*환자 진료 에피소드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모두 허구입니다.
초기 뇌경색 환자들은 뇌혈관이 다시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를 덜 굳게 만들어주는 약, 항혈소판 약물 또는 항응고 약물을 처방한다. 그리고 뇌 혈류량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생리식염수 수액을 투여하고, 어느 정도의 고혈압은 특별히 치료하지 않고 두고 본다. 이번에 입원한 어르신은 약물 치료에 잘 협조해주었고, 무관심한 상태가 지속되어 도움이 필요했지만 입으로 충분히 식사가 가능하였다.
입원 2일째에 어르신의 부인과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드님이 진료실로 찾아왔다. 어제는 부인께서 직장에 있는 아드님이 신경 쓰면 안된다고 알리지 않았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환자의 상태를 듣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뇌MRI 검사 영상을 모니터에 띄우고 설명을 시작했다.
“갑자기 소식을 들어서 놀라셨죠. 저는 아버님 당뇨 치료해주시던 내과 이정국 선생님에게 의뢰를 받고 아버님 진료를 맡게 된 신경과 의사 김상윤이라고 합니다. 3일 전부터 아버님이 걷질 못하셔서 머리 안의 뇌에 병이 생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어머님과 함께 급하게 뇌MRI를 찍게 되었습니다.”
나는 진료실 책상 위의 모니터를 아드님이 보시게끔 돌려주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이 아버님의 머리 속을 찍은 뇌MRI 사진이에요. 우리 머리는 단단한 두개골이 있고, 그 안에는 이렇게 호두처럼 보이는 뇌가 들어있습니다. 이 사진은 가로 단면으로 보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꺼에요. 여기가 앞쪽, 여기가 뒤쪽, 여기가 오른쪽, 여기가 왼쪽이에요.”
“네.”
안경을 쓴 아드님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여길 보시면 아버님 뇌의 왼쪽 앞부분인데 다른 부분과 다르게 하얗게 보이시죠? 이 부분이 이번에 뇌경색이 발생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건 뇌혈관만 나오게 찍은 사진인데 왼쪽 앞으로 가는 뇌동맥, 이걸 전대뇌동맥이라고 하는데 여기가 좀 좁아져 있어요. 아버님께서는 오랜 시간 당뇨와 흡연으로 혈관이 좁아지다가 결국 막히게 된 것 같습니다.”
“흠...”
아드님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저랑 어머니가 늘 담배 좀 끊고 당뇨약도 잘 먹으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정말 답답합니다.”
“네 사실은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 고혈압과 당뇨 치료, 금연 같은 건강관리를 의사들이 강조하는 건데, 큰 일이 생기기 전에는 잘 모르세요. 하지만 이제라도 생활습관을 바꾸고, 당뇨 치료를 잘 받으시면 다시 뇌경색이 재발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직은 뇌경색 초기라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니 이미 지나간 일로 너무 후회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회복하시도록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병실에서 아버지를 보고 왔는데 이전이랑 좀 다르세요. 이전에는 말씀을 잘 하시는 편이었는데, 제가 갔는데도 쳐다보시지도 않고, 세상 일에 아무 관심 없어 보여요.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당신 이름만 자꾸 얘기하시네요. 이제 완전히 치매가 오신 건가요?”
아드님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MRI에서 보신 것처럼, 아버님이 이번에 뇌경색이 생긴 부위가 뇌의 앞쪽, 전두엽이라고 합니다. 전두엽은 우리 몸의 운동 기능을 하는 것 외에도,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주고,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 계획을 세우고, 갑자기 어떤 충동이나 욕망이 생겨도 사회적으로 문제 없게 조절해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아버님의 왼쪽 전두엽에 병이 생기다 보니까, 오른쪽 다리 힘이 빠지고, 주변에 무관심해지고, 반복적인 행동을 멈출 수가 없고, 소변 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비슷한 경우에 회복하신 분들도 많이 있으니 아직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열심히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아드님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나는 그가 희망을 잃지 않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입원하고 이틀이 지나고 나서는, 어르신이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해주면서 좀 더 자세하게 신경학적 검사를 할 수 있었다. 먼저 어르신의 이름과 주소, 지금 대통령의 이름을 써보도록 했다.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름 ‘박대원’을 쓸 때 ‘박박박..’이라고 성을 반복해서 쓰다가 이내 자신의 이름을 틀리지 않고 다시 썼으며, 나머지 주소와 지금 대통령의 이름을 거의 정확하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왼손으로 글씨를 써보게 했더니 상황은 달라졌다.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하나 쓰고는 계속 그 모양의 글자만 반복해서 쓰는 보속증(perseveration, 새로운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자꾸 같은 동작만 반복하는 증상)을 보였다. 내가 목소리로 불러주고 다시 쓰게 했을 때와 직접 글씨를 써주고 따라 쓰게 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글씨가 아닌 도형을 그려주고 따라 그리게 했을 때에도 왼손으로는 전혀 흉내도 낼 수 없었다. 혹시나 오른손으로 받아쓰기, 글자 따라 쓰기, 도형 따라 그리기를 하시도록 해봤지만, 오른손은 큰 문제없이 잘 해냈다.
이번에는 “머리 빗질 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보세요.”, “망치질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보세요.”라고 말해보았다. 역시 오른손은 큰 문제없이 해냈지만, 왼손은 전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빗과 망치를 쥐어주고 직접 들고 써보시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손 모두 정상적으로 주어진 도구를 잘 사용하였다. 더욱 신기한 사실은, 빗과 망치를 보여만 주고 “이 물건들을 어떻게 쓰는 건지 저에게 보여주세요”라고 했을 때는 물건이 손에 없어도 문제없이 양손 모두 잘해냈다는 것이다.
“어르신, 왼손이 보신 것처럼 잘 안되시는 것 같은데, 불편하진 않으세요?”
느낌이 어떤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보았다.
“손이 바보야...”
어르신은 초조해보이지는 않았고, 조금 걱정은 되지만 크게 대수롭게 느끼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아직 왼손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진 않지만, 아까 빗이랑 망치질은 잘 하셨잖아요. 그리고 오른쪽 다리 힘도 처음보다 좋아지셨구요. 좀 더 나아지실 테니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힘내 봐요. 네?”
내 간곡한 부탁에 환자는 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의 뇌를 보면 크게 왼쪽 대뇌 반구와 오른쪽 대뇌 반구로 나뉘어 있는데, 그 사이에는 다리 역할을 하는 뇌량(corpus callosum)이라는 부분이 있다. 박대원 환자와 같이 뇌량의 앞부분이 뇌경색 등으로 손상을 입게 되면, 왼쪽 뇌에 있는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과 왼손의 감각운동을 담당하는 오른쪽 뇌의 부분 사이에 다리가 끊겨서, 왼손으로는 자발적으로도, 불러주어도, 보고도 글씨를 못 쓰게 되는 증상, 즉 실서증(dyslexia)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손잡이의 경우는 왼쪽 뇌가 우성 반구(dominant hemisphere)라고 하여, 왼쪽 뇌에 숙련된 운동의 잠재 기억(skilled movement engram)이 저장된다. 박대원 환자의 경우에는 도구를 직접 보거나 쥐어주었을 때에는 잘 사용한 반면, 특히 말로만 시켰을 때는 잘 해내지 못했으므로, 이 어르신의 뇌량 중에서 언어 중추와 연결된 신경섬유는 손상되었지만, 숙련 운동 잠재 기억과 연결된 신경섬유는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언어와 관련된 신경섬유는 뇌량의 앞부분에, 시각과 관련된 신경섬유는 뇌량의 뒷부분에 있다는 것이 여러 사례 보고와 동물 연구로 확인되었다고 하니, 박대원 환자의 경우에도 부합하는 셈이다.